[최종포스팅]-그동안의 고민의 끝! 침묵의 나선이론 커뮤니케이션이론


그동안 제가 다뤘던 내용을 다시 살펴보니 크게 집단이성과 프레이밍과 의제설정이론, 이 두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초반에는 집단이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대중에세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했다면 후반에는 그들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전달자'에게 초점을 맞추었어요.

처음에는 오손웰즈의 실험에서 왜 사람들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에 부화뇌동을 했는지에 관해 권위에 대한 복종과 연결시켜 생각해봤고 다음에는 일본 대지진 성금 모음과 관련하여 대세와 다른 의견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광우병 촛불 시위와 관련해서는 공포는 대중과 언론 쌍방향조성이다 라는 주제로 이야기해보았구요, 집단이성의 상실(을 지식층의 측면에서 살펴보기도 했습니다. 또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상에서 집단압력이 존재할까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았구요, 고 노무현대통령의 추모행사관련 보도노암촘스키의 책보수와 진보신문을 비교해가면서 미디어가 의제를 어떻게 설정하는지 ,그들이 세상을 보는 틀을 어떻게 짜고 그것이 대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외에도 몇가지 다른 포스팅들이 있지만 다 곁다리거나 그래서 큰 논의의 줄기는 이렇게 살펴볼 수 있겠네요(큰 줄기라기엔 너무 긴 것 같기도 하고.. ㅋㅋ)

 

처음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다뤄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것이 침묵의 나선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더군요. 이 복잡한 세상을 그나마 근접하게 설명해준 좋은 이론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어째뜬 이제부터는 이것이 침묵의 나선 이론 아래 어떻게 설명되는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예전에 일본 성금모금운동이 애도의 획일주의로 흐르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누구하나 일본에 대하여, 또는 모금활동에 대해 조금이라도 어긋난 소리를하면 네티즌의 뭇매를 맞아야 하는 것이 지금의 사회분위기”라고요.. 당시에는 일본을 도와줘야 한다! 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 그것이 과도하다던가 왜 우리가 일본을 도와줘야되 라던가 하는 의견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간혹 나왔다가도 뭇매를 맞고는 다시 쑤욱 들어가버렸더랬죠. 그러니 인터넷과 언론 매체는 모두 일본에 대한 애도로 가득 찾더랬죠. 바로 이것이 침묵의 나선이론입니다. 대세에 언론에 눌려 소수의 의견을 가진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이를 이용하면 광우병 촛불 시위에 이야기 하면서 제가 던졌던 질문도 해결됩니다. 당시 집단 이성의 주체라고까지 평가받던 다음의 아고라에서 군중심리가 작동했던 이유! (군중 심리라는 말이 여기 딱 어울리지는 않습니다만) 왜 아무도 이미지로 허상을 만들어내는데도 검열해내지 못했을까요? 바로 그들과 반대의견을 가졌던 소수의 사람들이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이 사고의 기본은 물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비스듬하게 보면서 늘 왜? 정말?이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당시에 아고라에서는 ‘광우병은 위험하지 않아요’ 하는 의견들은 묵살당했습니다. 혹여 그런말이 나오면 정부의 돈을 먹었다는 둥, 니나 먹으라는 둥 악플이 꼬리를 달았고 신상이 털리기도 하고 그랫었죠. 그러니 용기있던 한 두사람이 도전했다가 자취를 감춘 후 소수의 의견은 죽 소멸된 것이죠.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 숨은 것이지 자신의 의견을 수정한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누군가는 인터넷을 보다보니 내가 틀렸군 할 수도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견표출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전에 인터넷에서는 집단압력이 존재하지 않아요 라고 했던 제 의견은 조금 수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세의 의견을 형성해서 소수의 의견자들에게 위화감을 주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집단압력이 될 수 있으니까요.

 

미디어는 대세의 의견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세상을 보는 틀을 제공해주고 사건에 대해 주류의견을 전달해주면서 말이죠. 일단 세상의 보는 틀이라하면, 프레이밍이론과 연결될 수있겠는데 현실에서 보자면 크게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가 있겠네요. 그런데 미디어의 이러한 틀짓기는 문제가 있습니다. 구분은 우리의 사고를 그 틀안에 가두고 차별을 만들어냅니다. 물론여기서 차별이란 단어는 너무 안어울리지만, 어째뜬 그들이 내세운 잣대대로 우리는 사람들을 둘로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진보 아님 보수, 아군 아님 적군... 광우병때는 그 정도가 더 심했던 것 같고 제 생각으로는 조중동과 한겨례 경향이 넘을 수 없는 선을 그어버리게된 중요한 사건이 아닌가 합니다. 하여간 이제 미디어는 자신이 가진 틀 안에서 주류의 의견들을 마구 전송하기 시작합니다. 권위있는 매체에서 전달된 메시지는 인터넷을 통해서 확산, 분포되기 시작하는데 시간이 지나고 이 사건이 조금 자리잡을 때 쯤 되면 이제 우리가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되는지가 형성이 됩니다. 근데 이 때 주류의견은 다수의 의견이라기보다는 뉴스매체에서는 지배계층(이 것은 앞에 포스팅을 참고하시면 될 것 같아요^^http://dailylifa.egloos.com/613905/ http://dailylifa.egloos.com/666355

), 인터넷에는 활발하게 자신의 의견을 사람들의 의견입니다. 그들의 의견 앞에 소수자들은 침묵하게 되고 자신들이 침묵하니 동조자를 찾을 수 없는 다른 소수자들 역시 집단 압력에 의해 입을 다물게 됩니다. 일본 지진당시의 애도 획일주의와, 황우석 때 진실을 밝히고자했던 PD수첩을 매도했던 사건도요 아마 다른 의견을 가진 자, 진실을 가진 소수의 자들은 분명 존재했을 테지만 그들이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정지를 하지 못하고 마치 파충류떼처럼 무리지어 달려간 것 같네요.

 

요약하자면 미디어는 지배적인 틀을 제공하고 주류의견을 전달하며 사람들은 그에 따라 주류 의견을 형성하게 되고, 소수자들은 숨어버리며, 제동을 걸어준 존재들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그게 우리 모두의 의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우루루 몰려다니면서 비합리적인 사고로 ‘군중심리’라는 단어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도와줬을 지도 모르죠..

 

그러나 지금은 2011년, 걸어다니면서도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저 초등학교때만해도 유니텔썼는데.. 이제는 얼마다 빠르고 다양하게 소식들을 접할 수 있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새롭게 등장하는 뉴미디어는 조금 다르게 쓰였으면 합니다. 물론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가 언론의 대안체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1인 미디어에 기존 뉴스보다 떠 빠른 소식통들이죠. 저는 이 것이 변하지 않고 모든 사람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주는 사고도 필요하겠죠? 그것이 뉴스가, 신문이 내놓는 틀에 박힌 환경에서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를 할 수 있는 길이 될 것 같습니다.


보수와 진보적 시각을 결정하는데는 경제논리가 작동한다? 커뮤니케이션이론

예전에 노암 촘스키의 책에 관한 포스팅을 올렸었는데요,
그 때 보수진문과 진보신문을 가르는 것이 경제적 논리에 의한 것이다라는 말을 잠깐 했었어요.
물론 제가 한 말은 아니고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긴 하지만.ㅋㅋ
어째뜬 이 말을 듣고 '정말 그럴까?'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더구요

그래서 일단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치 성향을 조사해본 표를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한겨례신문>이 지난 7~8일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KSDC,소장 이남영 세종대 교수)와 함께 전국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 이념성향조사에서 이런 흐름이 확인됬습니다.(http://blog.daum.net/qmffndkdlaleldj/235)

 

   
보시다시피 조사에서 자신을 중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43.9%로
진보(30.7%)나 보수(25.3%)보다 많았습니다. 이런 주관적 중도층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고 해요.
근데 신문이 세상을 보는 틀은 크게 진보와 보수 이분법적으로 갈려있습니다. 물론 중도 신문인 한국일보나 있기는 하지만 판매부수도 많이 줄고, 사정이 많이 어렵다고 하더군요.. 

흠 어째뜬!!  궁금한 것은 우리나라에는 중도계층이 많은데 신문은 진보와 보수 두가지 창문만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사실 경제논리대로 하자면 중도신문이 더 많아야 하는 것이아닐까요? 또 진보와 보수의 창이 존재하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진보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니 진보신문이 더 많아야 하는 것 아닌까요? 제 짧은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그래서 그 답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논의의 범위는 조중동한겨례경향만등의 주요 신문으로 좁히겠습니다.~ 우리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기도 하고 노암촘스키에 따르면 중소신문사는 결국 대메이저 언론사의 틀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고 하고 하니까요. )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엄청엄청 고민을 해봤지만 답을 찾기가 어렵더라구요. 만약 미디어가 경제논리에 따라 사람들이 원하는 기사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공중이 미디어의제를 결정한다는 것인데.. 사실 의제설정실험에서도 볼 수 있다시피 그 둘사이에는 원인과 결과간에 상관관계가 높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디어가 공중의 의제를 설정한다는 것이 그 둘 사이의 상관관계가 더 높죠. 따라서 저는 신문이 고객들의 입맛에 맞춰 뉴스를 생산한다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 고객이 대중이 아니라 사회 지도층이라면?               

그럼 또 다른 이야기가 되죠. 경제논리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노암촘스키가 말하기( ) 를 언론사의 상품은 구독자이고 시장은 광고주라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신문을 개인과 언론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여기서는 광고주와 언론사의 관계가 주가 됩니다. 언론사들은 구독자의 수준을 높혀 광고수입을 높이기 위해 애를 씁니다. ' 우리의 신문은 사회지도층이 보는 신문입니다. 여기에 광고를 실으면 당신 회사의 판매 수익이 올라갈 것이니 광고를 주십시오!' 뭐 이런 식이겠죠?
   

그렇다면 가장먼저 조중동과 같이 아젠다를 결정하는 언론사가 할일은 엘리트 구독자들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야겠죠.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구독자들으 노암촘스키의 말에 따르면 이른바 정치 계급이고 이 계급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정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결국 신문은 구매자와 판매자의 입맛을 충족시키는 정치적 견해를 가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요? 잘보여야될 사람은 우리가 아니고 그들이니깐요.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긴데 신문사들의 수익구조에서 판매를 통해 얻는 수익을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의 수익은 다 광고에서 나는 것인데, 기업논리에서 생각하자면 이런 구조를 비난할 수도 없겠네요. 기업의 목표는 수익창출과 지속가능경영이니...  그래서 주요 언론사 중 보수신문의 숫자가 더 많은가봅니다.

하여간 결론을 짓자면 진보와 보수라는 스펙트럼은 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며, 그 중심에는 대중이 아니라 사회 지배계급과 광고주가 있다는.. 뭐 그런 것이 되겠네요.
늘 결론은 흐지부지하다는 생각이 들지만......☞☜..다음 포스팅은.. 똑부러지는 결론을 내겠다고 다짐하며 ..


 
 

6월2일수업리뷰우!-침묵나선이론과 다원적무지에관하여. 커뮤니케이션이론

침묵나선이론에서 미디어의 역할 중 하나가 어떤 의견이 지배적인지 보여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긴 질문 하나!
과연 보여주기만 할까요?
제 생각에는 단순히 사실을 보여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된 의견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촘스키의 책을 봤더니.. 언론이 권력에 물려 여론을 왜곡한다는 주장에 물들어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만은..


그리고 오늘 수업중에 <탈개인화의 사회 정체성모델>에 대한 예시로 예비군이 언급됬었는데요
사회에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든 예비군 훈련장에서 군복을 입고나면 결국은 예비군화된다
는 말씀을 듣고 생각났던 실험 하나! 스탠포드 대학의 감옥실험!!

스탠포드 대학의 감옥실험이란?
1971년 스탠포드 대학의 Philip Zimbardo 교수가 진행한 행동실험으로 실험의 목적은 '감옥과 같은 억압된 환경에서 사람은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스탠포드 대학 지하에 모의 감옥을 만들어놓고 사람을 모집했습니다. 짐바르도는 그 중 가장 정상적이고 평범한 21명의 피실험자를 선정했고 동전을 던저 가짜 교도관과 가짜 죄수역할을 나누었습니다. 일단 죄수 역할을 맡은 사람은 집으로 돌려보내졌고 다음날 짐바르도는 지역 경찰서 경찰관들의 도움을 얻어 그들을 각자의 집에서 체포하여 수갑이 채워지고 눈이 가려진 채 가짜 교도소로 이송되어졌습니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수인번호가 적인 죄수복이 지급되었고 그들은 번호로 불려지게 됩니다. 그런데 첫날부터 평범했던 실험참가자들은 이상행동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짜 교도관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앗는데 새벽 두시에 죄수를 깨워 팔굽혀펴기를 시키고 침대를 뺏고 맨손으로 변기청소를 시키기까지 합니다. 죄수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교도관들은 그들에게 소방전을 뿌리고 선동자를 독방에 집어넣어버립니다. 시간이 지나가 교도관들의 가학적 행동은 더욱 심해졌고 죄수역할을 맡은 실험 참가자들 역시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고 탈주 계획을 모의하는 등 진짜 죄수와 다름없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재밌는 것은 누구든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실험을 그만두고 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2주를 계획했던 실험은 6일만에 중단되어버렸고 짐바르도 교수는 실험 결과에 대해 <인간성에 대한 슬픈 결과가 나왔습니다. 상황이 이기고 사람이 졌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제 생각에는 역할이 행동을 결정짓는다는 이 실험으로도 예비군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참고로 YOUTUBE에 나온 실험관련 동영상들입니다.







  


 


노암촘스키가 바라본 언론의 왜곡현상이유. 커뮤니케이션이론


요즘 제가 <촘스키, 세상의 물음에 답하다>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이 책은 노암 촘스키가 10년 동안의 간담회, 연설회 등을 통해서 세상의 물음에 답한 내용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총 세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금 제가 읽고 있는 것은 1편 <권력이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에 관하여>이예요.
근데 책을 읽다가 프레이밍이론에 관하여 이야기 된 내용이 있어서 함께 나눠볼까합니다.

(이 책은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되있어요! 내용이 기니 취사선택하여 그대로 옮겨적겠습니다!)

Q 나는 미국정부와 기타 권력기관들이 주요 언론들에 대하여 모종의 압력을 가함으로써 기사 작성과 보도 태도가 정부나 기관들의 입맛에 맞도록 조치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A 언론은 전제조건의 틀 안에서만 논의를 진행시킵니다. 언론의 논의라는 것은 이미 정해져잇는 전제조건을 더욱 강화시키고 나아가 의견의 스펙트럼은 언론이 미리 짜놓은 그 전제조건뿐인 것처럼 대중들을 세뇌합니다. 서방의 시스템은 이렇습니다. 이른바 "자유 아래서의 세뇌활동"이라는 걸 책임있는 비평가들이 수행하고 있는데 그들은 논의를 어떤 용인 가능한 범위내에 묶어 둠으로써 정부의 방침에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Q 그런 상황을 만들어내는 필터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언론에 곤란한 입장이나 의견이 게제되지 않도록 감시하는 그 필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습니까?

A 뉴스와 정보의 제공이라는 측면을 살펴보자면 아른바 아젠다(의제)를 결정하는 언론들이 버티고 있다는 기본구조를 감안해야합니다. 대기업 언론사들이 기본틀을 정해놓으면 중소기업 언론사들은 거기에 적응해야만 하니다. 언론 재벌들은 중요한 자원들을 많이 갖고 있고 전국에 퍼져잇는 중소기업 언론사들은 그것들을 써야만 합니다.
이런 언론 대기업들을 살펴보면 그들은 몇 가지 중요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아젠다를 결정하는 언론사들은 대기업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다른 더 큰 재벌들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판매해야 할 상품과 그것을 출하하는 시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론사의 상품은 구독자이고 시장은 광고주입니다. 따라서 신문의 경제적 구조는 그들의 구독자를 다른 기업에 판매해야하는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빠진 신문사는 신문의 유통부수를 줄이는 반면 구독자의 수준을 높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게 광고수입을 높여주기 때문입니다. 뉴욕타임즈와 같이 아젠다를 결정하는 미디어들은 특혜층의 엘리트 구독자들을 다른 기업들에게 판매하고 있는 겁니다. 이 신문들의 독자는 이른바 "정치계급"이고 이 계급의 사람들이 우리 사회의 정책을 결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문들의 구도에서 어떤 세계관이 나오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신문들은 시장의 구매자와 판매자의 필요, 이해, 관점을 충족시키는 정치적 견해와 관점을 내놓는 그런 세계관을 내놓지 않을까요? 에드 허만과 나는 <여론조작>이라는 책에서 "프로파간다모델"이라는 자명한 이치를 설명했습니다. 이 모델을 적용해보면 언론 기관은 그들의 이익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은 단순 프레이밍이론에서 나아가 언론의 그러한 특성이 사실을 왜곡하고 특정 계층의 잣대의 입맛에 맛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결국 보수와 진보신문이 갈리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하셨던 교수님 말씀도 생각나네요.


노무현대통령 서거 2주기 행사를 바라보는 보수신문과 진보신문의 비교 커뮤니케이션이론



5월 23일, 노무현 대통령 서거 2주기를 맞아 전국 곳곳에서 추모행사가 열렸습니다.

저도 대사관에 비자받으러 갔다가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덕수궁 앞에서 열린 사진전을 보았었는데요.


벌써 노무현 대통령이 돌아가신지 2년이나 되었다니.. 시간가는 것도 새삼 놀랍고 그렇습니다.



 덕수궁 앞 행사 (http://www.slrclub.com/bbs/vx2.php?ympus_e10_forum&no=361318&nsk=1.1306912400.50a8b64887ff3f43f54f03266b00abec)
                                                                                                                                        
제가 찍은 것은 아니고.^^ 다른 분이 찍은 것을 가져왔습니다.!!


 이 행사는 전국적으로 굉장히 크게 열렸다고 해요. 근데 재밌는 것은 이것을 보도하는 신문들의 모습입니다.
진보신문들이 이 행사를 대대적으로 크게 보도한데 비해 보수신문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 재미있지 않나요? '기자가 바라보는 곳이 곧 뉴스다'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들이 바라보는 곳이 곧 기사군요(처음에 이말을 들었을 때는 아 멋있다했는데,, 프레이밍이론을 배우고나니 ㅋㅋㅋㅋㅋㅋ 이것이 곧 기사왜곡의 시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날 경향신문을  보면
이게 이날 경향신문 첫 페이진데요.
첫 페이지부터 추모행사에 관한 내용이 크게 나와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날 경향신문은 이에 관한 기사를 특집으로 구성할 만큼
추모 행사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한겨례신문도 마찬가지구요.  

















반면 조선일보의 일면입니다.
보시다시미 국가의 안보를 강조한 기사가 일면에 위치해있고
추모행사에 관한 기사는 신문 어디를 봐도 나와있지 않습니다.
동아일보도 상황은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동아일보는
뒷면에 살짝 작게 다뤄놓긴했지만요..
기사의 크기와 배치가 중요도를 결정한다고 볼때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 사건의 크기와 중요도는
별로 크지 않나봅니다.

















지금까지 故노무현대통령의 추모행사를 통해서 다른 성향을 가진 신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은 프레이밍이론의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아요. 각 신문들은 세상을 구성하는 자신만의 뚜렷한 프레임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지금이야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채널이 많기 때문에, 신문이 말하는 것이 곧 진실이며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이 없습니다. 또 그들이 가진 틀이 사회의 전체의 틀이 되기에는 우리는 트위터,페이스북 등 너무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ㅋㅋ 그러나 최소한 그들은 그들과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공고하게 만들어줄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이것을 차별적 수용자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보수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더욱 보수적으로 그 반대의 사람들은 더욱 더 그렇게 만드는 역할같은 것,,? 처음엔 아닌것같아도 자꾸 들으면 옳다는 생각이 들듯이?(적절한 비윤가?? ㅋㅋ) 항상 그 틀로만 세상을 본다면 내가 보는 세상은 그 세상이 되겠죠? 이야기를 끌고다가보니 살짝 문화계발효과랑도 연결되는 것 같은데,,, 하여간 오늘 포스팅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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